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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블로그 2010. 12. 11. 19:00

우리 아빠는 우여곡절 많은 베트남인 요리사

벌써 30분 째 어둑어둑한 골목 입구를 바라보지만 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감기까지 걸리셨는데 이렇게 만날 늦으시니 아버지 건강이 걱정된다.

 

 

내 아버지는 베트남 사람이며 직업은 요리사다. 베트남의 큰 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였던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되던 해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와 아내까지 교통사고로 잃었다. 친구의 배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아버지께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술로 나날을 보내셨고 급기야는 세상을 등지려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두 살이었던 나를 혼자 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용기를 내셨고 그 후에 이주를 결심했다고 했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바로 기회의 땅이라 말하는 대한민국이었다.

 

아버지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두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시작한 다른 나라의 생활은 쉽지 않았을 거다. 할 줄 아는게 식당 일 뿐이라 이 음식점, 저 음식점으로 옮겨 다니며 온갖 궂은일을 해낸 아버지. 당신의 전공인 요리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언제나 설거지와 재료 준비하는 일만 하길 몇 년이었다. 성실히 일을 하고도 일이 느리다고 맞고, 말을 못 알아듣는 다고 막 욕을 먹기 일쑤였다. 언젠가는 계속 안주는 월급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추운 겨울, 어린 나와 차가운 밖으로 내쫓긴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베트남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셨다. 어떻게든 이 땅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고 결심하며 항상 이를 악물었다. 나에게 베트남 이름 대신 한국식 이름인 ‘준모’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이런 아버지의 바람 덕분에 나는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한국! 좋은 사람들도 있구나

아빠를 너무 힘들게 해서 내 생각에 한국 사람들은 다 나쁜 줄 알았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다 보니 한국 사람들도 그리 나쁜 것 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우리 같은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 다문화센터에 가서 한글을 배웠다. 그리고 대학생 자원 봉사자 멘토 선생님과 전화도 하고 숙제도 같이 했다. 덕분에 나는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학교생활도 즐거웠다.

 

학교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도서관에는 내가 읽고 싶은 재미난 책이 잔뜩 있어 도서관만 들어가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글을 알게 되니 공부도 점점 흥미로웠다. 결국 4학년이 될 무렵에는 학교의 모든 경시대회 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베트남 요리로 한국의 주방장이 된 아버지

그 후에도 좋은 일은 계속 되었다. 나의 사정을 알게 된 교장 선생님이 친척이 운영하는 서울의 한 식당에 아버지를 소개 시켜 주신 것이다. 마음씨 좋은 식당 주인 아주머니 덕분에 아버지는 마음 편히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재능을 알아보신 아주머니 덕분에 아버지는 주방장으로도 취직했고, 점차 베트남 요리 메뉴를 늘려갔다. 아버지의 요리는 반응이 좋았고 그 후 이 음식점은 이름까지도 베트남 식당으로 바꾸게 되었다. 다른 베트남 식당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베트남 요리를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고친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이제 이 음식점은 예약을 해야 지만 들어갈 수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되었다.

 

각종 신문과 잡지에도 소개되었다. 서울을 여행 하는 베트남 여행객을 위한 코스로 이 식당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식당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사진과 사연이 베트남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이 때 만큼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트남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바로 사기를 쳤던 아버지 친구가 보낸 편지였다.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버지에게 사기를 치고 아버지의 인생을 한순간에 뒤바꿔 버린 친구.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봉투에 적힌 이름만 한참을 바라보셨다.

 

 

 

 

옛 친구를 만나다

며칠이 지난 후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준모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이제 우리 조그만 집으로 이사갈 거다. 진짜 우리 집으로. 그리고 네가 태어난 베트남도 한번 다녀오자꾸나.”

 

“정말이요, 아버지?”

 

나는 모든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 집이 생긴다는 것도, 그리고 몇 번이나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슬퍼할까봐 여쭤 볼 수도 없었던 베트남에 간다는 것도.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한 달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처음으로 우리 집이 생겼고 내방도 생겼다.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책상도 컴퓨터도 다 내 것이 되었다. 나도 이제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꿈에 그리던 베트남도 방문했다. 몇 시간에 걸쳐 도착한 곳, 하노이. 서울과 비교해 많이 부족하지만 내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하노이가 낯설지 않았다. 그곳에 머무는 2주가 꿈과 같이 흘러갔다. 아버지와 베트남 말을 해서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글을 못 읽고 어려운 말은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외국인 대우를 받았는데, 베트남에서 태어난 내가 이곳에서도 외국인인 것 같았다.

 

아버지와 한 병원을 찾아 가셨다. 그리고 찾아간 병실에서 깡마른 아빠의 친구를 만났다. 그 분은 아버지를 보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셨고 아버지 손을 붙잡고 “잘못했다. 잘못했다”를 반복하며 우셨다.

 

아빠의 친구는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죄책감에 살았는지 그리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씀 하셨다. 그리고 우연히 아버지가 난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죽기 전에 아버지를 보고 용서를 빌려고 편지를 쓴 거라고 하셨다. 아빠의 친구는 이제 두 세 달 후면 눈을 감을 것이라고 했다. 폐암 말기. 나는 그제야 그분이 예전에 아버지에게 사기를 치셨던 그 친구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도 우셨다.

 

 

베트남에서의 꿈같은 2주를 다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편했다. 한국이 그립기도 했다. 아버지 친구 때문에 아버지가 힘들어 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한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면 나는 반은 베트남, 반은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나를 있게 해준 두 나라를 위해 살아야겠다. 그리고 미래에 변호사가 되어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여성들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해 일해야겠다. 두 조국을 위해 일할 것이다. 앞으로 공부도 더욱 열심히 해서 능력 있는 변호가가 되리라...

 

 

 

 

아빠! 우리, 한국에서도 씩씩하게 살아요!

“추운데 왜 또 기다리고 있어? 어서 들어가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골목 입구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기침을 하시며 한손에는 군밤을 사들고 오시는 나의 아버지. 내가 잘 먹는다며 군밤장수 앞을 그냥 지나가시는 법이 없는 아버지가 오늘 따라 많이 힘들어 보인다.

 

 

“오늘도 식당 바쁘셨어요?”

 

 

“그래, 그래도 힘내야 우리 준모 책사주지!”

 

나란히 걷는 우리 앞에 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 아버지 머리처럼 하얀색은 점점 늘어간다. 나의 한국이 하얀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글은 법무부 블로그 이민재 기자가 쓴 다문화 단편소설 ‘준모의 겨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글 = 이민재 기자

일러스트 = 아이클릭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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