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대한민국 법무부 공식 블로그입니다. 국민께 힘이되는 법무정책과 친근하고 유용한 생활 속 법 상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겠습니다.

법블기 이야기/힘이되는 법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를 알아보자

법무부 블로그 2024. 7. 31. 17:30

 

 

 

검사(劍士)범죄를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며 재판을 집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검사는 누구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우리나라 검찰 제도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895325,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법률 제11895. 04. 01. 시행)이 발표되며 우리나라 법 제도에서 처음으로 검사라는 용어와 관직이 등장했습니다. 다만 이때까지의 검사는 조직 체계상 독립된 검찰 기구를 갖추지 못하고 재판소의 직원으로서 수사 · 소추권 행사하였습니다. 각 재판소의 직원에 판사, 검사, 서기, 정리(廷吏)가 있었고, 재판소는 지방재판소, 한성 및 인천 기타 개항장재판소, 순회재판소, 고등재판소, 특별재판소의 5종을 설치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6,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여 1호로 졸업하고, 검사시보로 임명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이준(1859~1907) 열사입니다.

 

그는 대한제국기 대한협동회 부회장, 국민교육회 회장, 헤이그 특사단 부사 등을 역임하여 독립운동가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그는 구한말 대한제국이 최초로 육성한 근대 법조인이자 1세대 검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준은 오랫동안 검사시보로서 일하지는 못했는데, 조정 관료들의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가 불과 약 1개월 후인 35일 면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89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이듬해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섭니다.

 

 

 

△  만국평화회의보 (1907 년  7 월  5 일자 ) 1 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  왼쪽부터 이준 ,  이상설 ,  이위종 선생이다 . < 출처 : prix at ko.wikipedia.org>< 네이버 지식백과 >

 

 

이후 그는 법안연구회(法案硏究會) 조직하고, 이를 확대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 결성하여 회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다시 검사로 등장합니다. 19066월 최고사법기관인 평리원 소속 검사로 임용된 것입니다. 이때 그는 권세가인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사이에 벌어진 묘지 분쟁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능력을 인정받자, 특별법원 검사도 겸임하게 됩니다. 당시 이준 검사는 황족인 이재규가 문서를 위조하여 다른 사람의 전답을 빼앗은 사건에 대하여 엄정하게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는데, 신분고하에 흔들리지 않는 법조인으로서의 신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같은 해 10, 그의 검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로 작용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종이 황태자(순종)의 재혼을 맞이해 은사령을 내렸는데, 법부에서 작성한 명단을 내려보내자, 이준은 은사 명단 작성은 검사의 고유권한이라며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체포된 애국지사들을 은사 명단의 첫머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법부는 이준이 작성한 은사안을 무시한 채 고종에게 보고하였습니다.

 

19072월 이준 검사는 이에 반발하여 법부 형사국장을 직권남용 등으로 고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하관이 상관을 고소한 죄(이른바 항명)’에 의한 체포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백성들의 요구가 쇄도함에 따라 그는 3일 만에 보석 석방되게 됩니다.

 

그는 이에 뜻을 굽히지 않고 평리원 재판장 이윤용(이완용의 형)과 법부대신 이하영 이하 관리들 모두의 면직과 처벌을 청원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검사는 국가의 대표가 되어 형법상 독립의 권한을 가지며 공소제기의 권한을 가지니,
본인은 검사의 직에 있으면서 직을 다하지 못하여 항상 두렵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중략)
본인이 검사된 몸으로 국가의 막중한 형법을 사사로이 유린함을 보고 공분을 참을 수 없어
본부에 한 차례 기소하고 한 차례 청원하였으나 모두 수리하지 아니하고,
(중략)
법부대신 및 평리원 재판장 이하 제법을 모두 상주하여 면관하고 체포 징치하게 하여
나라의 헌장을 바로잡고 국민의 분원을 풀어주시기를 청원합니다.

-광무 11(1907) 316일 이준의 청원서 중-

 

 

그러나 그는 결국 파면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이준의 강직함을 알 수 있었고, 당시 대한제국이 배출한 첫 번째 검사이며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불의와 불법에 목소리를 내온 정의로운 검사였던 곧고 올바른 성품의 명연설가였던 그를 누구보다 일본의 불법침탈과 불법 행위를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하여 헤이그 특사로 파견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고 헤이그에서 평화와 정의를 외치게 됩니다.

 

 

△ 이준열사의 모습

 

 

 

“헤이그 밀사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되면

어느 누가 청산에 와서 술잔 부어놓고 울어주려나.

가을바람 쓸쓸한데 물조차 차구나.

대장부 한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리”

 

 

그는 만국평화회의에서 특사로 활동하다 순국합니다.

 

이준 열사, 그는 대한제국 시기 최초의 근대적 법률 교육을 받은 우리나라의 1호 검사이자, 강직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곧고 올바른 성품으로 법과 원칙에 따라 검사로서의 직무에 충실했던 그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귀감이 될 것입니다.

 

 

 

= 16기 법무부 국민기자단 정건일(중등부)

 

[참조]

- 이준 열사 특별기획전(https://www.spo.go.kr/leejune/leejuneSub01_01.do),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www.spo.go.kr/leejune/leejuneSub01_01.do),

- ()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이준열사, 그 멀고 외로운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