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을 올라가며 느리게 올라오는 당신(남편)에게 ‘왜 여자보다도 늦게 올라와’라고 한 말이 걸려요. 갑자기 병원에 입원해 머리카락의 양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겁이 났어요. 당신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서워서 창문을 닫고 잤어요. 아픈 당신을 보면서 평범하게 보낸 지난 시간들이 아까웠어요. 14년의 결혼생활 중 평범하게 지내온 12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시간인지 이제야 알았어요.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아들, 앞으로 1년 365일 더욱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어요.
- 김희경씨의 편지 요약 -
▲ 백혈병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는 김희경 씨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김희경(39)씨는 2년 전 남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합니다. 집안의 가장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두 살 터울의 남매가 있었기에 김희경씨는 마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김희경씨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가족들의 건강검진. 적어도 1년에 한번 씩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 스케줄에 맞춰 날짜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해서 아예 남편의 생일을 건강검진 날로 정해 버리고 1년에 한번씩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지요” 김희경씨는 이 다짐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 ‘가정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바라는 점, 화목한 가정을 위해 필요한 것, 가족의 꿈과 희망까지 담아 4장 19조에 해당하는 ‘1365 평범한 가정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가정헌법은 ‘제2회 가정헌법 만들기’ 공모전에 출품되어 1105: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5월 25일 법무부 정부과천청사에서 있었던 시상식에 아버지 황창근(40), 어머니 김희경, 아들 황정희(14), 딸 황지원(12)이 참석해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직접 상장과 상금을 받았습니다.
▲ 제2회 가정헌법 만들기 대상작
INTERVIEW | ‘1365 평범한 가정헌법’(대상) 가족
Q. 가정헌법의 이름을 ‘1365 평범한 가정헌법’이라고 정하셨는데, 1365란 무슨 뜻인가요?
A 1365는 1년 365일을 뜻합니다. 남편의 백혈병 진단을 계기로 1년 365일의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고 가정헌법 이름으로 정하게 되었지요.
Q. 가정헌법 중 유독 눈에 띄는 조항이 ‘매월 각자 용돈으로 후원하는 기관 지속적으로 관심 갖기’인데, 가족마다 후원하는 기관이 따로 있나요?
A. 남편은 혈액암협회에, 저와 아이들은 유니세프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남과 함께하는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거든요. 아이들 같은 경우 한 달에 1만 5천원의 용돈을 받는데 그 중 1/4 가량인 3천 500원을 매달 후원하고 있습니다.
Q. ‘눈뜨면 스킨십으로 아침인사하기’ 라는 조항에 ‘질투하기 없기’라는 조건을 적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A. 우리 아들 때문이에요. (웃음) 저는 우리 두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하는데 우리 아들이 느끼기엔 자기 동생인 딸을 제가 더 아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가 딸에게 스킨십을 해도 질투하지 말라고 그 부분을 적었죠. 물론 아들한테도 똑같이 스킨십을 해주고 있고요^^
Q. 마지막으로 수상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A. 대상받을 기대는 전혀 안했어요. 발표가 났다고 해서 수상작을 아래쪽부터 쭉 보고 있었는데, 저희 게 제일 위에 있는 거예요. 대상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주신 상금 중 절반은 저희를 축하해 준 주위 사람들에게 한턱 낼 거고요. 나머지 절반은 우리 가정헌법의 마지막 조항인 ‘가족여행 가기’를 실천하는데 쓸 계획입니다.
집안에 ‘헌법’ 만든 별난(?) 가족들
대상을 수여받은 ‘1365 평범한 가정헌법’ 외에도 눈에 띄는 가정헌법들이 많았습니다. 대상 가족에 이어 수상 가족들을 몇 분 더 만나보았습니다.
INTERVIEW | ‘우리 마음의 크레파스 한·몽 다문화 가정헌법’(우수상) 가족
Q. 가정헌법 공모전은 어떻게 알고 참여하게 되셨나요?
A. 저는(몽골인 엄마 버르길마씨) 한국어를 남편과 인터넷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하다가 가정헌법 공모전을 한다고 봤는데, 헌법이 뭔지 가정헌법이 뭔지 궁금했습니다. 남편한테 설명을 듣고, ‘그거 좋은 거니까 우리도 하자’ 그래서 공모하게 되었지요.
Q. 헌법 조항에 엄마는 몽골의 문화를 가르치고, 아빠는 한국의 문화를 가르친다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실천하고 계신가요?
A. 저희 집 식탁엔 몽골음식, 한국음식이 다 섞여 있습니다.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호쇼루라는 몽골식 튀김만두지요. 또 저희 집은 결혼식이나 아이들 돌잔치 등을 한국에서 한번 몽골에서 한번 두 번씩 합니다. 한국에서 산다고 한국 문화만 강조하거나, 몽골 엄마라고 몽골 문화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가정헌법 포스터에 크레파스를 그린 것처럼 저희 가족은 다양한 색깔을 내며 살고 싶습니다.
INTERVIEW | ‘함께 가꾸는 규설·규원이네 가정헌법’(장려상) 가족
Q. 가정헌법 조항에 ‘라오스에 있는 녹노이와 함께하자’는 내용이 있던데, ‘녹노이’가 누구인가요?
A. 저희 딸입니다^^ 작년에 MBC 무릎팍도사에 한비야씨가 출연해 월드비전 이야기를 하셨는데, 너무 감동적이라 저희도 월드비전에 후원신청을 냈습니다. 그리고 라오스에 있는 12살 녹노이와 연결되었지요. 고3인 쌍둥이 아들밖에 없어서 늘 딸을 갖고 싶었는데, 멀리 있지만 예쁜 딸을 갖게 되어 행복하답니다.
Q. 후원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A. 녹노이 생일에 예쁜 머리핀을 사서 보내줬어요. 딸 아이 머리핀 사는 걸 얼마나 해보고 싶었나 몰라요. 우리 아들들은 여동생이 생겼다고 편지도 자주 쓰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저희 가족은 나중에 녹노이가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면 유학도 오게 할 생각입니다. 가정헌법 조항에도 적었지만 매년 1명씩 늘려서 후원아동을 10명 더 맞이하는 것이 저희들 꿈입니다.
가정헌법이 있다면 싸움도 쉽게 해결
법무부가 ‘법질서 바로세우기 운동’ 일환으로 시작한 ‘가정헌법 만들기’는 아직 2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횟수가 적으니 참여율도 낮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번 가정헌법 만들기 공모전에는 전국에서 1천 105편의 작품이 접수되는 등 수상작으로 선정되기까지 40: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헌법 공모전에 참여했던 가족들은 가정헌법을 만들면서 가족간의 대화도 많아지고,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달리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화합과 단결이 잘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자녀와의 갈등, 부부 싸움 등 집안의 소소한 문제들이 생겼을 때 가정헌법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칙과 규칙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고 양보하는 일이 훨씬 쉬워졌다고 하더군요.
가정헌법은 멋진 말이나, 어려운 법률 용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한번 사랑한다 말하기’, ‘일주일에 한번 안마해주기’ 등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면 됩니다. 가족이 함께 그리는 꿈, 그리고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다면 가정헌법은 집안의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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