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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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블기 이야기/힘이되는 법

신은 내게 지독한 시련과 함께 ‘아버지’를 주셨습니다.

법무부 블로그 2010. 9. 3. 11:00

내가 꿈을 꾸는 이유

조00 | 성동구치소

   

 

 

 

저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합니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제 자신을 뒤돌아보곤 합니다. 참 어리석고 바보 같았던 모습들...... 돌이켜보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기에 가슴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기회를 준 것 같아 감사하기도 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야 할 나이에 비관된 모습으로 살았던 제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비가 내리고 난 후면 세상이 깨끗하게 씻어지고 밝은 해가 뜨듯이, 제 인생의 힘든 이 시간도 깨끗이 씻어지고 밝은 해가 뜨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웃으며 지내는 날보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웠지만 하나뿐인 동생이 많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경기를 심하게 하였고 발작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새벽에 동생을 들쳐 업고 응급실로 향하기 일쑤였고, 부모님은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수없이 병원 치료를 받아보고 약도 써봤지만 동생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지체 1급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쁘기만 하던 내 동생이 장애 판정을 받던 날. 저희 부모님은 어떤 심정이셨을까요. 감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 후 부모님은 싸우시는 날이 많으셨습니다. 술로 하루를 잊어 보려 했으니 큰소리 나는 날이 많았던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내기를 몇 해,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하게 되셨고 저와 제 동생은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힘든 여건 속에서도 저희 형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안정한 가정이 싫었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택시를 운전하시던 아버지와 아픈 동생을 보며 어린 나이에 “내가 잘해야지”라는 생각보다 숨이 막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학창시절 사고도 여러 번 쳤고, 그러다보니 어느덧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문제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엉망으로 삶을 살던 제가 세상을 올바르게 살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모두 아버지 덕분입니다. 제가 사고 친 자리에는 어김없이 아버지의 눈물이 흘렀고, 아버지의 눈물마저 저버릴 수 없었던 저는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에 취직하여 돈도 열심히 벌었고, 아버지의 소원이었던 군대도 무사히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군 제대 후 가전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로도 일했고, 저축도 하며 내일을 생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잠시나마 아버지가 원했던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제게 왜 불행한 그 사고가 생겼는지...... 저는 5층에서 떨어지는 실족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골반 뼈가 부러지고 팔목 뼈는 완전히 부서져서 철심을 박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6개월을 병원에서 보냈고 나중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일단 퇴원을 한 후 통원치료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사고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직장도, 꿈도, 그리고 그동안 아끼고 모았던 돈들도. 다른 사람들은 제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말했지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제 기분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 뜻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인지, 그 후 참기 힘든 시련이 또 한번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위암 중기 판정.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평생 자식들 때문에 고생만 하며 살아오셨는데, 이대로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 두렵고 서글펐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정 형편은 저로 인해 급격히 어려워진 상태라 아버지의 위암을 치료해드릴 돈도 없었습니다. 그쯤 저는 매일 눈물만 흘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제가 안쓰러웠는지 괜찮다며 신경쓰지 말라고 하시고, 증세가 어떤지 조차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아버지께 잘해드리지는 못할망정 가슴 아픈 상처의 말만 남겼습니다.

 

 

그날도 저는 아버지를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아버지, 얼마나 아프신 건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보시란 말이에요” 그러나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움에 복받친 저는 그 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아무 말씀 없이 계실 거면, 차라리 사라져 버리세요. 제 앞에 보이지 말란 말이에요” 아버지나 저나 평생 가도 지울 수 없는 그 말.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너무 아프고 저립니다. 저는 그때 모든 것이 저 때문이라는 압박감에 견딜 수 없었고, 현실을 잊고 싶어 매일 술만 찾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필요했던 저는 결국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고, 또 빼앗고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일부러 외면했습니다.

 

 

결국 저는 죗값을 받아 교도소로 왔습니다. 제가 진 죗값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와 동생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 지켜주고 있는 ‘그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 덕분에 심적으로 힘들었던 수용생활은 안정되어 갔고, 어느덧 이곳에서 지낸 시간도 10개월이 지났습니다. 10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제 삶에서의 이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멀지만 지금의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아버지는 현재 3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으셨고, 주기적으로 세포전이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십니다. 동생은 장애 때문에 직업은 가질 수 없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그녀는 오늘도 직장을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저를 찾아와 가족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 대신 아버지와 동생을 돌보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모두 끝나고 나면, 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 겁니다. 옛날엔 세상이 왜 나만 괴롭힐까 원망했지만, 이제는 그 지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저의 아버지와 동생과 사랑하는 그녀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매일 미래의 꿈을 꾸며 살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교정본부에서 재소자들의 글을 모아 만든 책

‘새길(통권 410호)’에 실린 글입니다.

죄목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재소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죄목을 밝히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여기서 잠깐!

 

 

교도소에서 복역한 사람들 중에 약 1/4은 3년 내에 또 다시 범죄를 저질러 재복역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우리나라의 경우 연평균 수용자 수가 4만 8천여명에 달합니다. 이 중 1만 500여명(22.7%)이 3년 내에 재복역하는 인원입니다. 이 수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은 수치지만, 그래도 아직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무부는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 ‘재범방지 사업’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범죄예방 사업’보다 더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수형자들의 건강한 사회복귀를 위해 취업 알선·기술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수형자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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