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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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민주'를 만나다

법무부 블로그 2018. 11. 1. 16:00


      


조선시대는 무엇이든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였을까요? 서양에서는 동양의 군주가 전제군주로서 마음대로 나라를 지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 서양의 생각이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는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당시로서는 어느 나라보다 대단히 민주적인 나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이 독단적으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공론정치를 펼친 나라였던 것이죠. 그 대표적인 제도가 대간제도’, ‘사관제도’ ‘구언’, ‘상소’, ‘경연’, ‘신문고격쟁입니다. 지금부터 이러한 제도가 무엇이고, 왜 훌륭한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간(臺諫),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

조선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구조를 왕권-재상권-대간권의 삼권으로 나눴습니다. 대간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뜻하며 언관또는 간관이라고 불렸습니다. 대간은 말을 마음대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였으므로, 요즘 말로는 언론의 독립을 확실히 보장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간은 왕의 언행을 바로 잡기 위해 건의하는 간쟁’, 관료들의 부정, 비위를 문제 삼아 물러나게 하는 탄핵’, 부당한 인사를 바로잡는 서경등이 임무였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건의하는 내용은 왕이 그것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왕이 거부하면 홍문관까지 합세하여 사직서를 내고 대궐에 모여 뜻이 받아들질 때까지 시위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삼사라고 하였고, 태종이나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대간을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대간을 아예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상소(上疏)와 구언(求言), 의견을 올리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직언을 구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의견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막힌 것이 트이고 가려진 것이 걷히어서 상하의 감정이 소통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선행을 빠뜨릴 수 있으며 어떤 원통함이 해명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경국대전 예전 구언진서(求言進書) 중에서 -

 

상소는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왕에게 건의를 할 수 있고 왕이 직접 읽어보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군현의 수령과 도의 감사, 중앙의 형조나 사헌부를 거쳐야 해서 절차가 복잡했다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상소가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지는 조선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큰 역사적 사건의 시작은 상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때로는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왕이 전국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이를 구언이라고 하였습니다. 왕의 구언에 따라 건의한 내용은 비록 과격할지라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은 언로가 트인 민주적인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관(史官), 왕의 모든 언행을 감시하다

사관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관 없이 왕과 신하가 독대하는 것은 금지되었는데, 이는 말하자면 사관이 왕의 모든 언행을 감시하였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관이 쓴 기록(사초)은 왕이 보지 못하게 하여, 사초의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도록 하였고 왕이 죽고 나서야 그 왕에 관한 실록편찬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세계문화유산이 된 조선왕조실록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렇듯 사관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것을 적었고 그 적은 내용을 왕이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왕이 얼마나 조심해서 행동하고 말하고 결정했겠는지 명약관화합니다. 조선의 왕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과, 사관의 붓끝에서 나오는 기록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 심하고 철저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요즘으로서도 그렇게까지는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 기록하면서,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보여주지도 않고, 대통령이 물러난 후 그것을 모아 역사서를 쓴다고 생각해봅시다. 정말 대통령은 쉽게 말하지 못하고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이며, 부정한 언행은 아예 생각지도 못할 것입니다. 조선시대라면 박근혜 전대통령이 재벌들과 독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사관이 함께 했다면, 재벌들과의 부정한 거래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조선은 정말 대단한 나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연(經筵), 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공부

조선 경국대전에는 경연(經筵)국왕에게 경사(經史)를 강독하고 논사(論思)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함께 유학의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단순히 공부하는 것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왕과 신하가 함께 국정을 협의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경연을 기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종은 20년간 매일 하루 한번 경연에 참석했으며, 성종은 25년간 매일 하루 세 번씩 경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신문고(申聞鼓)와 격쟁(擊錚), 조선판 국민청원?

백성이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제도로 신문고와 격쟁이 있었습니다.


신문고는 태종 때 설치되었는데, 창덕궁의 이정전과 서남문, 경희궁의 숭정전, 동남문에 있었다고합니다. 억울한 백성은 우선 해당관청이나 수령, 감사에게 호소하고, 해결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며,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신문고를 두드려 직접 왕에게 호소하는 절차였습니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청와대 청원제도와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격쟁은 왕이 지나갈 때 징이나 꽹가리를 쳐서 호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문고가 폐지된 후 영조때 속대전을 제정하여 격쟁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격쟁은 형식적인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정조때 영의정 서명선은 최근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의 관습이 어리석고 완고하여 국왕이 탄 가마 앞에서 격쟁하는 일이 일상사로 되어 버렸습니다라면서 격쟁을 제한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정조는 격쟁은 민정이 전달되도록 하려는 방법이니, 그 때문에 혼잡스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만화조선왕조실록 7, 박영규 편집, p.96).

 

조선은 알면 알수록 참으로 대단한 나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조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10기 법무부 블로그기자 심이담(중등부)

참고도서= 만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편집, 웅진주니어

유교 위에 세워진 조선의 법과 정치, 양태석, 주니어R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