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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든든한 지원군, 항일변호사

법무부 블로그 2016. 10. 14. 09:00



흔히 일제강점기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뼈아픈 시대와 싸운 독립운동가일 것입니다. 최근 개봉한 밀정에서 다뤄진 의열단처럼 당시에는 독립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한 국민들이 있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역사에서 이라는 도구로 일제에 대항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도 있습니다. 오늘은,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된 이인선생을 통해 항일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법정에서 저들과 싸우리라

 

이인 (항일변호사/초대 법무부장관)

 

1896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인은 1912년 경북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1914년 일본대학 법과 야간부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인은 유학시절에도 일대제국지등의 신문이나 잡지에 일본 총독부를 비판하는 글을 투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인의 저서 <반세기의 증언>에서는 일제의 사법과 경찰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을 한 자신의 글로 인해 형사의 미행이 붙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인은 1918년 서울로 돌아와 잠시 다른 일을 하다가 다음 해에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법률공부를 시작해, 1922년 변호사시험에 응시해 만27세의 나이에 합격을 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재판의 모습


일제 강점기 당시에 식민지 법정은 어떤 환경이었을까요? 당시 재판소는 전국에 약 100개소가 존재했지만 조선인 판검사의 수는 일본인 판검사의 수의 20분의 1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인 판검사를 비롯한 경찰 등의 집행관들은 조선의 풍습조차 알지 못했으며 조선인의 권리가 공평하게 보장된다고 보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재판 역시 통역사를 두기는 하나, 대체로 일어로 진행되었으며 그 용어가 복잡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서 은 가까운 것이 아니었지요.

 

실제로 이런 절차를 제대로 알지 못해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일본거류민을 위해 각 도시에 설치된 일본이사청에 제출하는 국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이인에게 법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인은 법률을 공부하면서 법정에서 저들과 싸우리라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영화 밀정의 배경인 2차 의열단사건의 변론을 맡다

 

출처: 동아일보 1923.4.12

 

이인은 변호사가 된 후, 독립운동의 변론을 위해 일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그가 맡은 첫 변론은 영화 밀정의 배경인 2차 의열단 사건이었습니다.

 

>>제 2차 의열단 사건

1922년 의열단 단원인 김시현은 대규모의 암살파괴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폭탄과 무기를 반입하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경찰)인 황옥의 협조를 구했다. 반입은 성공하였으나 김시현을 비롯한 의열단원은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반입한 폭탄과 무기 역시 압수되었다.

1923년에 개정된 이 사건의 공판에서 황옥은 자신은 경부(=경찰), 의열단을 체포하기 위해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건의 규모가 컸기에 변호인들 역시 다수로 구성되었고, 이인 역시 변호인단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변호사들은 총독 정치를 비판하며 의열단의 행동이 민중을 위한 행동이었음을 주장했지만 그 안에서도 의견은 갈렸습니다. 변호인단 사이에서도 감형론을 펼치는 변호사가 있었고, 애초부터 그들의 행동을 무죄라고 주장하는 변호사가 있었던 거죠. 이인은 의열단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변호사 중 한사람이었고 이런 변호사들의 변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떳떳하고 굽힘 없는 의열단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법정이라는 벽에 의해 김시현과 황옥은 검사 측의 주장에 따라 각각 10년의 징역을 선고받게 됩니다.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항일변호사

식민지 법정에서의 승산은 어찌 보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이 다루는 법 또한 일제의 법이라는 인식 하에 변론을 거부하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식민지 법정이라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장소에서 매번 극적인 좋은 결과를 얻은 것도 아니었으며 때로는 공격적인 변론에 의해 변호사 자격을 정지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인은 그 이후에도 광주학생사건, 안창호사건, 6.10 만세사건 등의 약 15백여 건의 변호를 맡아 활동했습니다. 이인 외에도 허헌, 김병로를 비롯한 변호사들은 무료로 독립 운동가를 변호하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후세 다츠지와 같이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변호를 한 일본인도 있었고요.

 

 

 

항일변호사의 노력으로 인해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의 재판 과정이나 참혹했던 고문 의 내용이 언론을 통해 일반인에게도 알려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감형 또는 무죄라는 판결을 얻어낸 경우도 있었고요. 이길 수 없는 재판이라고 해서 우리 독립 운동가들을 돕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나라는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을 위해 법적 지식과 수려한 언변으로 일본과 싸웠던 우리 항일 변호사들! 이러한 그들의 모습에서 법률가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보게 됩니다.

 

 

조사/정리 = 8기 법무부 블로그기자 김예덕(대학부)

참고 = 한인섭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호하다.경인문화사, 2006

이인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학교출판부,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