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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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블기 이야기/힘이되는 법

시티홀의 신미래, 교도소에도 있다

법무부 블로그 2009. 7. 9. 08:03

 

 

 

얼마 전, 10급 공무원에서 지방 시청의 시장이 된 골드미스의 이야기-<시티홀>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이 드라마가 20회가 끝날 때 까지 수목드라마 시청률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이유는 ‘맨 땅에 헤딩!’하는 10급 공무원 노처녀의 쉼 없는 노력이 생활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빛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진출처 : SBS 드라마스페셜 시티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나 10급 공무원에서 한 시의 시장이 된 신미래처럼, 가난을 딛고 일어나 9급 교도관에서 지방교정청장이 된 남자 신미래가 여기 있습니다.

송영삼 신임 광주지방교정청장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인터뷰 - 송영삼 신임 광주지방교정청장

 

1950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출생한 송영삼 신임 광주지방교정청장은 가정 형편 탓에 대학진학 등의 꿈을 접고 1972년 3월, 9급 교도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주경야독으로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후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낮은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한 단계씩 발전해 온 송영삼 광주지방 교정청장은 어렵고 힘든 시절 자신이 교도관을 직업으로 택한 것이 천직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Q.많은 직업 중에서 교도관을 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사실 처음에는 교도관이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교도관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냥 무조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용자들과 함께 생활 하는 것에 책임감과 사명감이 생기고 성취감도 생겼습니다. 제 천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Q. 교도관 생활을 하시면서 대학까지 다니셨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A.
힘들었지만 가고 싶은 대학을 포기하고 교도관이 되었던 터라,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커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송통신대학교라서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시험기간이 겹치거나 하면 하루 두 시간씩 자면서 공부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푹 자보는 게 소원일 때였지만, 그 세월이 지나고 나니 좋은 경험이자 추억이 되었습니다.

81년도에 7급 승진시험때는 수석을 하기도 했고, 법무 연수원에서 16주 동안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법무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무관 승진 시험때에는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지요. 잘 될때와 잘 안될때의 편차가 컸던 것도 그 당시에는 충격이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꼭 필요한 순간의 경험이었다! 싶지만 말입니다.

 

송 청장은 38년째 교도관 생활을 하면서 일선 기관장(청송보호감호소, 청주여자교도소, 천안교도소, 수원구치소)과 법무부의 주요보직(작업훈련과장, 보안관리과장, 교정기획과장)을 골고루 지냈습니다. 2008년 7월 법무부 교정정책단장(국장급)으로 승진, 풍부한 현장경험과 탁월한 기획능력을 발휘하는 등 교정행정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 많은 기관을 거치셨는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A.
청송보호감호소 재직 중(2004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에 장기수형생활을 하는 사람과 보호감호중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귀휴(형벌휴가제도)를 되도록 많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매주 5명씩 1년 내내 귀휴를 보내주었는데, 한번은 징역 15년에 보호감호 7년형을 받은 사람이 귀휴를 다녀와서 제게 울면서 새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더군요. 감옥에 있는 동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고 충격이 컸다며, 앞으로는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싶고, 죄 많은 남편에게 따듯한 밥을 지어준 아내와 함께 평생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그 예길 듣고 저 역시 가슴이 찡해졌지요. 가족이 주는 영향력이 그 어떤 갱생 프로그램보다 더 높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1년에 전국에서 800~1000명 정도가 귀휴를 나갔는데, 저희 청송감호소에서 10% 정도를 차지했었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 굉장히 많은 수치였고, 그만큼 결실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Q. 교정 일을 하시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으며, 어떻게 극복 하셨나요?
A.
초임 교도관 때였으니, 아마 70년대 무렵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공직자의 보수도 굉장히 낮았고 주간 근무시간도 많고, 심야와 철야 근무시간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때는 2부제 시스템이어서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쉬는 시간에도 사람이 모자라서 온전히 쉴 수가 없어 또 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빡빡한 스케줄에 공부도 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가정을 등한시 하게 되고, 피로는 쌓이고 정말 ‘여기가 한계다!’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꾸준히 행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숨이 턱턱 막힐 때 ‘조금만 더!’를 외치며 꾸준히 살다보니 한 숨 돌릴 때도 돌아오고, 또 한 번 난관에 부딪힐 때는 노련함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필요치 않은 경험은 없나 봅니다.


 

Q. 청장님을 롤 모델로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A. 몇몇 후배들은 승진 시험이나 심사는 직무와 별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결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식상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니 정말 기회가 따라오더군요. 승진을 목표로 한 삶은 고난이 많습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고, 그 순간에 열심히 하니까 우연치 않게 좋은 기회가 많이 왔던 것 같습니다.

 

 

송 청장은 평소 “꾸준히 노력하면 한 방면의 전문가가 되고, 언젠가는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획득하여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된다.”는 한우물론을 후배들에게 강조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10년의 노하우면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표에 대한 욕심 보다는 목표를 향한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송청장의 지론은 두 아들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Q. 두 아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A. 저는 아이들에게 항상 ‘자기 삶에 만족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상은 높을 수 있지만, 형편이 맞지 않는데 그 이상을 쫒으려고만 한다면 내 스스로가 괴로워지게 마련이지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의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충족 되었을 때 내가 바라는 이상도 한발 더 가까워지지 않나 생각 됩니다.


 

여가시간에는 테니스와 배구, 등산을 즐기는 등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남다른 친화력을 갖춰, 후배 및 동료지간에도 신임이 두텁다는 송영삼 광주지방교정청장.

 

<시티홀>의 10급 공무원 신미래가 시장이 되면서 서민들의 민생을 보다 잘 돌본 것과 같이 9급 교도관 출신으로 청장이 된 송영삼 청장님도 임기 기간 동안 많은 후배 교도관들과 수용자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와 덕을 보여주는 멋진 청장님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