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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 씹어 먹어야했던 독립운동가의 형무소 생활

법무부 블로그 2011. 7. 19. 08:00

 

몽양 여운형 옥중기로 보는 독립운동가 수인생활(囚人生活) - 1.

 

 

 

 

▲해방직후, 대중연설을 하는 몽양 여운형 선생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86_1_0007211

 

 

‘독립운동가’ 하면 유관순 누나와 안중근 의사만 생각나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겁니다. 하지만 몇몇 분들의 활약(?)만으로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했다고 생각하며 큰 오산입니다! 이 두 분 말고도 우리나라 독립을 외치고, 정부수립을 위해 한 목숨 아끼지 않은 분들이 참 많이 계시는데요. 해방 후 분단이 고착화될 조짐을 보이자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약 64년 전 오늘인 1947년 7월 19일에 암살된 몽양 여운형 선생도 그 중 한분이십니다.

 

 

‘독립운동가’는 꼭 한번 거쳐 간다는 형무소 생활

몽양 여운형은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1886년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몽양은 한학(漢學)을 공부하여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우고, 강릉에도 초당의숙을 세웠으나 국권을 빼앗기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후 1913년 중국 남경(南京) 진링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다시 상해(上海)로 가서 1918년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여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1919년 4월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였으면 쑨원과도 교류하였습니다.

 

이후 1929년 7월 상해 대마로 야구장에서 경기 관람을 하던 중 영국경찰의 협조를 받은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조선 언론에서는 조선독립운동의 거두가 체포되었다는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가 조선에 도착할 무렵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으로 몰려가 여운형을 보고자 하였지만, 일본경찰은 소요 사태를 우려하여 도착 예정지인 서울역 대신 용산역에 내려 여운형을 호송하였습니다.

 

 

 

▲1929년 7월 용산역에서 호송되는 모습

 

 

예심판사는 ‘이쓰이’라는 일본인으로 배일사상을 버리면 면소 판결을 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몽양은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몽양에 대한 재판은 예심만 거의 1년이 걸렸는데, 치안유지법 대신 제령(制令) 위반으로 1930년 6월 9일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을 확정되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얻은 다섯 가지 병(病)

몽양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인생활을 하다가 1930년 9월 20일 오전 경부선 열차를 통해 대전교도소로 이송되어 본격적인 수인생활을 시작하였는데요. 16년간의 오랜 해외 망명생활로 인해 형무소 수인생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병(病)으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요.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다섯가지나 되는 병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병이 무엇인지 살펴볼까요?

 

1) 목숨을 건 격투! - 귓병

몽양 여운형이 형무소에서 다섯 가지 병 중 첫번째는 귀(耳)의 고막이 상한 것이었습니다. 옥중기를 인용하면 ‘맨 처음 상해에서 잡힐 적에 운동장에서 경관과 격투하다가 귀를 몹시 얻어맞았는데, 그 때 고막이 상하여 귀는 병신이 되고 말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잡히지 않으려는 사람과 잡으려는 사람의 사투가 격하다 보니, 이런 큰 상처를 얻게 된 것 같은데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공권력의 가혹행위’라 하여 아주 큰일이 나지 않을까요?^^;;

 

2) 형무소에서는 돌도 씹어 먹어야 한다!? - 잇몸병

둘째는 잇몸 염증이었습니다. 당시 형무소 급식 중 주식은 조밥으로 돌을 잘 걸러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몽양은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서 이 한 개가 부서지고 잇몸 전체가 상하여 염증을 일으켜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좌로부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선생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3) 과연 물 때문일까? - 소화불량

셋째는 소화불량인데 이로 인해 가장 크게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으로 호송될 당시는 7월로 날이 더워 냉수를 많이 마셨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소화불량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소화불량으로 인해 입소 당시 약 79kg이었던 체중이 출소 직후 약 61kg가 되어 거의 20kg의 체중이 줄어 얼굴이 수척해지고 늙어졌으며 나왔던 배가 쏙 들어갔다고 합니다. 냉수를 많이 마셔 소화불량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 퍽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꼭 냉수 때문이 아니더라도, 형무소에서의 고된 생활과 불편한 마음이 그의 소화기관에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4) 형무소생활의 인내를 시험한다 - 신경통

형무소에 수감된 지 며칠 되지 않아 신경통이 격렬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입소 6개월이 지나자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세어버리고, 불면증도 생겨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니, 상당한 고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 형무소생활의 참담함 - 치질

다섯째는 치질입니다. 당시 치질은 형무소에서 만연했던 질병으로 묘사되는데 네 번이나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치질의 원인은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 거실에서 장시간 정좌하고, 작업장에서도 장시간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서 작업하는 수인생활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1929년 11월 17일자 중외일보에 따르면 ‘서대문형무소 여운형 치질로 고통 중, 11월 15일 박창운 박사가 출장진찰’이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미결 신분의 여운형 선생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일본은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정중한 처우를 해 주었음을 일부 짐작할 수 있습니다.

 

 

3년간의 옥살이, 30년은 늙어버린 독립운동가

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형기종료 4개월을 앞둔 1932년 7월 27일 가석방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옥중기를 통해, ‘옥살이 3년에 나는 병쟁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청년은 몰라도 성장기를 지난 중로(中老)급 사람은 옥에 갇히면 참으로 속히 늙어버리는 모양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몽양 여운형선생 62주기 추모식 ⓒ뉴시스 2009. 7. 19.

 

 

체육교사를 할 만큼 운동으로 다져진 선생도 일제강점기 형무소 생활에서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옥중기의 내용으로 보아 보통 사람들이 형무소 수인생활을 감당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음을 알 수 있었는데요. 교도소 내에서 취미생활을 하고, 재사회화를 위해 취업준비를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는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열악하고도 공포스러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무서운 형무소 생활도 꿋꿋하게 버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글 = 권창모(법무부 직업훈련과)

사진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