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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에서 만난 무식한 일본인 직원들

법무부 블로그 2011. 7. 19. 17:00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30년 6월 9일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인생활을 하다가 1930년 9월 20일 오전 경부선 열차를 통해 대전교도소로 이송되어 본격적인 수인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대전형무소 수형당시의 여운형 ⓒ연합뉴스

 

 

몰상식했던 교회사와 감옥의 왕이었던 간수

그의 옥중기에서 형무소 직원으로는 교회사(敎誨師)와 간수(看守)가 나오는데요. 먼저 교회사는 ‘형무소 안에서 가장 불유쾌한 감(感)을 주는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한 달에 한 번 ‘훈계’를 한다고 합니다. 선생은 이 훈계를 ‘딱 질색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싫어했다고 하네요.

 

또한 교회사는 서적의 차입 허가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 불온서적이라고 생각되는 ‘평화회의’ 등 역사서는 허가하고, ‘구운몽’, ‘세익스피어 전집’ 등 문학서는 불허하여, 선생은 이 교회사의 몰상식함에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역사서는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책이고, 문학서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인데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네요.^^;

당시 교회사는 일본승려가 많이 하였는데 사회적 소양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대목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사용되었던 직제상 명칭 중 현재도 ‘교회사’라는 명칭이 있는데요. 글자 그대로 수용자들을 교화하고 회개하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등장한 형무소 직원은 간수(看守)인데요. 선생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감옥안에서의 왕이다. 전옥이니 간수장은 수인(囚人)에게 별무관계이다. 수인생활의 편․불편은 담당간수와 간수부장의 손에 달렸다’

 

이러한 상황을 보니, 오늘날의 수형자가 느끼는 것과 일제강점기 수용자가 느끼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은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나름 교양 있는 일본인 간수에 의해 관리되었고, 조선인 간수가 자신의 담당이 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책적으로 독립운동가와 한국인 간수는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전교도소 수형생활

선생은 수감생활 중 주로 독방생활을 하였습니다. 옥중기에 독방생활을 1,095일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독방을 ‘그것이야말로 옥 속의 옥이다. 독방은 사람을 늙게 하는 곳이다.’라고 묘사하였습니다. 당시 사상범은 독방에 수용되어 타 수형자와 격리시켜 관리되었는데요. 여기에서는 운동 등도 개별적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1931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의 대전형무소 수용현황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대전형무소 재감인을 2월 3일 현재로 보면 839인으로, 구정 설을 또 철창에서 넘기게 되었다. 그 중에 일본사람이 24인이고 그 나머지 815인은 조선인인바, 죄명으로 나누어 보면 사상범이 11명, 절도가 328명, 강도가 294명, 사기가 49명, 살인 30명인데 그중에 초범이 319명이라 한다.

 

치안유지법 위반 및 제령 위반으로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하여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인 여운형과 제1차 공산당사건으로 역시 대전으로 이감 온 정재윤, 조한용 등은 모두 건강한 몸으로 매일 망(網) 뜨는 것으로 그날 그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기사를 통해 선생이 그물(網) 뜨는 일과 종이를 꼬아서 치룽(가로로 퍼지게 둥긋이 결어 만든 그릇) 만드는 일 두 가지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물은 남에게 빠지지 않게 빨리 곱게 만들고, 치룽으로는 광주리와 아이들 책꾸럭을 만들었으며, 일을 잘하여 상으로 목욕을 남보다 더 자주하였다고 합니다.

 

 

▲형무소에서 교도작업하는 수형자들

 

 

통상은 사상범에게 작업을 부과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옥중기를 살펴보면 사상범에게도 타 수인과 같이 작업을 부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형무작업으로 인한 수익은 형무소 운영비용의 40%를 감당할 정도로 작업은 형무소 운영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한명이라도 일을 더 시켜야 형무소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운동은 하루 40분 정도 하였는데 마음 좋은 간수를 만나면 1시간씩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옥중에서도 집필을 하고자 붓과 종이를 청구하였으나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한시를 몇 수 지었으나 기록하지 못하고, 기억해 두어 몇 번씩 읊었다고 합니다.

 

가을 바람은 소슬하고

구슬픈 비는 주룩주룩 뿌린다.

그 빗물 감옥 마당에 흘러가고

그 빗소리 이내 가슴에 스며드네

 

선생의 옥중기는 1932년 7월 27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나와 이야기한 내용을 기자가 옮겨 적어 당시 잡지인 신동아(1932. 9.)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44년에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분단이 고착화될 조짐을 보이자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암살되었습니다.

 

 

 

▲암살 당시 여운형선생이 입고 있던 옷

 

 

매년 7월 19일에는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여운형선생 추모식’이 열리는데요. 선생을 포함한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의 끈기와 희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선생처럼 이름을 날리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독립을 외치다가 죽어간 사람들은 참 많을 텐데요. 그들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보면 참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겠지요? 그들의 희생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는 오늘입니다.^^

 

글 = 권창모(법무부 직업훈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