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대한민국 법무부 공식 블로그입니다. 국민께 힘이되는 법무정책과 친근하고 유용한 생활 속 법 상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겠습니다.

법블기 이야기/힘이되는 법

6.25 전쟁중에 목숨걸고 교도소를 지킨 사람들

법무부 블로그 2011. 6. 24. 17:00

 

내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호국영령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25일에는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데요.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 뒤에는 형무소(교도소) 수용자들의 피해를 줄이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송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형무관(교도관)들도 있었습니다.

 

전쟁 중이라 일반인들의 목숨 지키기도 힘든데, 수용자를 지켜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죄를 지은 강력사범이 탈주하지 않도록 잘 막는 것이 전쟁중의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는 길이었기에 당시에 목숨을 걸고 수용자를 먼저 이송시키려고 노력하는 형무관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북한의 남침에 우왕좌왕하던 정부가 국민의 안전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형무소에 대한 전시비상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대부분의 형무관들은 각 소장의 지시에 따라 전시중의 수용자 이송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 6.25전쟁. 영화 ‘포화속으로’한장면 ⓒ포화속으로, 네이버 영화검색

 

 

개성소년형무소 우학종 소장의 자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인 형무기관은 38°선 1km 남쪽에 위치한 개성소년형무소였습니다. 사태를 직감한 우학종 소장은 직원비상소집을 명했으나 순식간에 형무소가 북한군에 포위당하자 조금만 버티면 6km밖의 국군 제12연대가 지원을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항전에 돌입했습니다. 북한군의 투항설득과 공격이 거듭되는 가운데 항전은 계속되었고, 외부와 통신두절 상황에서 직원들은 굴뚝에 올라가 바깥을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개성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 지원군이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항전 10시간 만에 소장은 저항을 포기하기로 하고 직원들에게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은 소장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피난 행렬 ⓒ 네이버 블로그 ‘대륙의 조선’ http://cafe.naver.com/tallest/345

 

 

좌익사범 등 7,000여명의 수용자가 있던 서울형무소는 대책 없이 상부지시를 기다리다가 28일 새벽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면서 관용부 수형자들을 석방한 뒤 직원들도 형무소를 빠져 나왔습니다. 마포형무소는 소속된 의정부농장(교도소 수용자가 영농 작업하던 농장)으로부터 전쟁발발 보고를 받은 뒤 직원 80여명과 수형자 400여명의 철수를 지시했습니다. 의정부농장에서는 본소에서 지원한 트럭에 수형자를 최대한 태워 출발시키고, 남은 수형자들을 도보로 호송하다가 중도에 본소 지원차량을 만나 낙오자 없이 전원 이송시킬 수 있었습니다. 인천소년형무소는 지휘체계가 흔들리고, 많은 직원들이 동요하면서 경비력이 약화된 틈에 소년수형자들이 집단 탈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수형자는 일시석방, 중범수형자는 목숨 걸고 남쪽으로 이송

6월 26일. 38°선에서 13km 떨어진 춘천형무소 내에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소장은 전 직원에게 1개월 급여를 지급하고, 거동이 불편한 일반수형자 250명과 직원 4명만 남겨두고 신남역으로 이동했지만, 열차는 물론 통신까지 두절된 상태였습니다. 강변에서 하룻밤을 보낸 호송대열은 소에 잔류했던 수형자 중 일시석방하지 않은 200명과 합류하여 수원을 향해 도보로 이동했고, 28일 전투경찰대의 경비지원을 받아 홍천 서면초등학교에 당도했습니다. 노령으로 동행이 어려웠던 소장은 중범수형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일시석방한 뒤 젊은 직원 15명과 간부 1명에게 호송임무를 맡기고, 나머지 직원들은 각자 남쪽으로 피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호송 도중 총기를 탈취했던 수형자 7명이 교전 끝에 사상하기도 했으나, 호송대열은 여주에서 열차편으로 30일 저녁 영등포형무소 수원농장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군의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수원농장에 집결한 수형자들은 7월 3일, 다시 전주형무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김천소년형무소는 7월 10일, 안동형무소는 7월 14일 수형자 전원을 대구로 이송했으며, 군산형무소와 전주형무소는 7월 16일 일반수형자를 일시석방하고 중범수용자를 열차편으로 광주로 이송했습니다. 지리산과 가까워 전쟁발발 전부터 무장공비의 공격목표가 되었던 진주교도소는 7월 하순 진주까지 전화가 미치자 일반수형자를 일시석방한 뒤 중범수형자 127명을 마산형무소로 이송했습니다.

 

 

ⓒ 한겨레 신문 (http://j.mp/kZ9Dbf)

 

 

 

전국 각지의 수용자들이 부산·대구·마산형무소에 집결

북한군에 점령되지 않은 부산, 대구, 마산형무소는 전시사범 증가와 각지에서 이송된 수형자 및 후퇴한 직원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특히 대구형무소는 수천 명의 좌익사범을 수용하고 있어 북한에서 침투시킨 첩자들이 제1의 공격목표로 삼았지만 철통같은 방어태세로 인해 무사히 시설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용인원이 8,000여명으로 증가한 부산형무소는 수용시설 부족과 피난 직원들의 주거문제로 난관에 봉착했지만 따뜻한 동료애를 발휘하여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기능을 회복하면서 형정국은 각 형무소의 임시사무소를 부산형무소에 설치하고 잉여인력을 부산, 대구, 마산형무소에 배치하여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낙동강전선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UN군이 총반격에 나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0일 38°선을 돌파함에 따라 수복지역에서 철수했던 각 형무소는 9월 말부터 선발대를 보내 환소를 준비했고, 11월 말까지 대부분 본소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또 다시 북한 치하로 넘어갔다가 3월 14일 재탈환한 이후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남한지역 형무기관에서는 파괴된 시설 복구와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 방호태세를 확립하면서 행형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알트이미지

 

전쟁초기, 정부의 전시비상대책 부재와 형무기관의 전시행형대책 부재 등은 극심한 혼란과 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형무소에서 뛰쳐나온 좌익수형자들은 적의 앞잡이가 되어 우익인사에 대한 보복살육과 파괴행위를 자행했고, 수많은 형무관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직장을 사수하다 순직하거나 철수에서 낙오되어 실종 또는 적에게 학살당하기도 했습니다.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전시수용업무를 수행하며 호국의 초석이 된 이들의 거룩한 희생.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이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월간교정 2011.5월호에 실린 ‘한국전쟁 중의 교정행정’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출처 = 월간교정 2011.5월호, ‘한국전쟁 중의 교정행정’

이미지출처 = 사진 하단에 밝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