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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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에서 온 나의 큰딸, 조안나

법무부 블로그 2011. 6. 23. 14:00

 

 

원제 : 머니마니 언덕(글, 사진 : 안진서)

 

 

 

지인소개로 11세 방글라데시 소녀 입양

 

결혼하며 했던 우리 부부의 약속은 ‘입양’과 ‘어려운 나라를 돕자’였습니다. 4년 후, 조금은 막연한 듯했던 약속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국내 입양을 준비 중이던 우리 부부에게, 가까운 지인이 방글라데시 아이 입양을 권유해 왔습니다. 일 년 전 방문했던 방글라데시에서 본 착하고 지혜롭고 예쁜 아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국외 입양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평안하게 뜻을 함께했습니다. 2008년 12월 모든 서류 절차를 마치고 11살 조안나와 함께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에서 온 조안나는 발전된 한국의 모습이 꿈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한국말을 하나도 몰랐고, 문화, 음식의 이질감은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먼저 의사소통이 되어야 했기에 몸짓, 발짓을 기반으로 약간의 기초 영어와 한․방글라데시 사전을 이용하였습니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또박또박 한글 문장으로 얘기했고 이해를 못하는 표정이면 그때 영어로 말하거나, 사전을 보여주었습니다.

 

문화적 적응도 힘든데 ‘말’을 ‘공부’라 생각하고 배운다면 더 힘들 것 같아서 하루 두 편씩 재미있는 한국 에니메이션을 바른 자세로 앉아 보게 했습니다. 비록 대부분 못 알아듣는 말이었지만, 재미있는 에니메이션이었기에 조안나의 눈은 시골 밤 반딧불 같았답니다.

 

입양과정 중 알게 된 임신소식

 

그리고 매일 쉬운 노래를 함께 불렀고 하루 종일 흥얼거렸습니다. 가사를 해석하며 이야기 해주었고, 공책에 두 번씩 쓰게 했습니다. 유아 수준의 책도 매일 읽고 따라 읽게 하였습니다. 여기저기 많은 곳을 다녔고, 간판, 눈앞의 사물 등을 쉬지 않고 얘기해 주었고 발음을 따라하게 했습니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반복하였더니 조안나의 한국말 실력은 일취월장 늘어갔습니다. 3개월 후엔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월, 수, 금은 한국말로 화, 목, 토는 방글라데시 말로.

 

2009년 3월 초 근처 초등학교에 청강생 자격으로 입학하였습니다. 말과 학업 모두 부족했지만, 학교 적응을 우선순위로 또래 아이들이 있는 4학년부터 시작했지요. 긍정적이고, 낙천적이고, 항상 밝은 조안나는 친구도 잘 사귀고, 학교생활도 훌륭하게 적응했습니다. 그리고 3월말 쌍둥이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조안나에게 문화적 적응보다 힘든 심정적인 위기감이 찾아온 것입니다.

 

조안나 입양을 준비하던 중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임신 20주에 방글라데시를 방문하여 조안나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아빠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조안나는 쌍둥이 동생이 얄미웠는지 아가들이 처음 태어났을 당시엔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엄마 조안나랑 동생들 중에 누가 제일 예뻐요?”

 

 

 

 

 

“세명 모두 예쁜데.. 왜?”

“아니요.. 그래도 그중에 한 명만 말해 주세요.”

“그럼 우리 조안나가 제일 예쁘지”

 

그러면 개구쟁이 같이 “헤헤헤~~~ ”웃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똑같은 질문을 하며 확인을 했고요.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조안나와 한참을 놀아준 후에야 쌍둥이를 들여다 볼 정도로 조안나에게 신경을 썼습니다. 조안나는 그렇게 몇 달이 흘러 엄마, 아빠의 사랑이 변함 없음을 깨달았는지 그제서야 쌍둥이 동생을 안아주기도 하며, 이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조안나가 풀이 죽은 채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6학년 언니들이 “쟤 외국에서 온 외국인이야” 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무척 기분 나빴다는 것입니다.

 

“엄마도 방글라데시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쳐다보고 말 시키고 했지? 언니들이 외국인이라고 얘기한 건 조안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야”

 

또 어느 날은 거울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난 왜 얼굴이 검정색일까요?”

 

 

 

 

 인터넷을 검색해서 미국의 유명한 모델 나오미 캠벨을 보여주며 그녀의 위상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램인 포토샵으로 얼굴을 뽀샤시하게 ‘뽀샵’ 해줄까?” 했더니 더 울상이 되며 하는 말이 “‘뽀샵’이 뭐에요? ‘뽀샵’은 방글라데시 말로 오줌이란 뜻인데.” 그때부터 우리는 한․방글라데시어 단어놀이를 즐겼습니다.

 

눈은 ‘쪽’, 해는 ‘술죠’, 노래는 ‘간’, 똥꼬는 ‘멀다’, 시계는 ‘고리’, 바다는 ‘사골’, 창고는 ‘골라’, 돈 달라는 ‘짜다’, 사랑노래는 ‘거절’ 등등... 아직도 비교․탐구하여 웃음을 줄 단어가 무궁무진하답니다.

 

“엄마! 한국에선 곰 고기도 많이 먹어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고기라 무슨 소린가 했더니 주위에 곰탕 음식점을 보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엄마 흑설탕엔 흙 들어가요?”, “엄마 추어탕은 추울 때 먹는 탕이어요?”라며 ‘추어’를 ‘추워’로 착각하는 등 웃지 못할 질문을 수시로 했습니다.

 

조안나가 한국에 온지 8개월쯤 지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거의 없을 무렵인 2009년 8월엔 본격적인 학습을 위하여 1학년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성격 좋은 조안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부담임 감투를 쓰고, 동생들의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했지요. 그리고 질풍노도의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키가 10Cm나 컸고, 생리를 시작했고, 가슴도 제법 커졌습니다. 수영장을 다니며 수영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고, 동작구 다문화 가족 다뮤즈라는 팀에서 오카리나를 배워 많은 곳에 자원봉사를 다녔지요. 한국이란 나라를 스폰지 물 빨아들이듯 쑥쑥 배워나갔습니다. 2010년 3월엔 시험을 봐서 3학년으로 점프하였고, 이젠 얼굴 가리고 들으면 외국에서 온 줄 모를 정도로 한국어 실력을 구사하였습니다.

 

 

 

 

 

조안나에게 열한 살 나이로 한국에 와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우리 부부에겐 엄마, 아빠로서 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내 아이로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엄마로서 강하게 잔소리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거짓말 하지 않기’, ‘정리정돈 잘하기', '깨끗한 생활하기’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거짓말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삶이라는 의식이 아주 자연스러운 문화로 형성되어 있어서 애답지 않은 뛰어난 연기력의 거짓말에 일 년을 속았습니다.

 

 

엄마 지갑에 손을 댔던 조안나의 거짓말에 밤새워 눈물

“가족이기 싫다면, 다시 방글라데시로 갈래?”

 

 

어느 날은 지갑을 보니 돈이 자꾸 없어지는 것 같아 세어 놓은 적이 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13장의 천원짜리와, 3장의 만원짜리가 있는 지갑에서 만원 한 장을 가져갈 정도로 대범해진 조안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조안나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믿어 지갑 관리에 소홀한 저에 대해 일차적인 잘못을 느꼈습니다. 또한 엄마가 모르니 백원짜리, 천원짜리, 만원짜리로 발전해 틈나는 대로 일 년 동안 돈을 가져간 조안나의 잘못에 기가 막혔습니다. 돈을 가져가서 쓴 것에 대한 행동을 합리화해야 했기 때문에 거짓말이 늘 따라붙은 것이고요.

 

또 위생 관리에 개념이 전혀 없는 아이에게 씻는 습관과 정리하는 습관을 길들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형성된 습관이라 시간을 두고 기다려줘야 했지만, 학교생활에서 자칫 잘못하면 왕따가 되기 십상인지라 잔소리를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안나는 땀에 기름 성분이 많아 액취도 심했고, 머리도 하루만 안 감으면 엄청나게 기름져 비듬도 많았거든요. 그러나 사춘기로 접어든 조안나에겐 이러한 엄마의 잔소리가 미치도록 듣기 싫었나 봅니다. 어느 날 조안나의 일기장에 여러 날 걸쳐 써 놓은 엄마의 욕을 발견하였습니다. 밤새 잠 못 이루고 뜬 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조안나는 책상에 펼쳐져 있는 일기장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제가 일기장에 엄마 욕 한 거요..”

“엄마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엄마를 그렇게 욕하는 것은 무슨 뜻 인줄 알아?”

“...”

“바로 우리가족이길 거부한다는 뜻이야. 엄마가 그렇게 싫으면 다시 방글라데시로 갈래?”

“아니요.”

 

엉엉 울며 절규하는 조안나에게 방글라데시로 다시 간다는 것은 가장 가혹한 벌이었습니다. 가슴에 난 상처가 아물어 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조안나 스스로도 많은 생각을 하며 고요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오직 쌍둥이 소리로만 시끄러웠고 지혜롭게, 아내 편에서 딸 편에서 위로를 해준 듬직한 남편이 고마웠습니다.

 

 

1년 반 만에 주민등록등본에 등재된 나의 딸, 조안나

 

 

조안나가 외국인 신분에서 한국 국적 취득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방글라데시 국적 포기와 국적선택(지금은 이중국적 허용으로 법이 바뀌었지만요)까지 출입국 관리소를 여러 번 드나든 끝에 드디어 우리가족 주민등록 등본에 등재되었습니다.(그 전엔 가족관계 증명서에만 명시되었죠!)

 

그러나 방글라데시 이름 그대로 올라가 성본 창설, 개명이 완성되기까지 총 2년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물론 조안나가 미성년자라 성인보다 절차가 훨씬 쉬웠지만, ‘방글라데시 아이 입양’이라는 역사적으로 전무한(?) 사건으로 인해 여러 애로사항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민등록등본에 첫째 딸 박조안나 주민번호 99****-2****** 를 확인했을 땐 얼마나 기쁘던지... 온가족이 파티를 열었답니다.

 

“엄마 우리 반에 은빛곧 이란 애가 있는데요.”

오늘도 조안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후 쉴 새 없이 쫑알거립니다.

 

“이름이 은빛곧? 헉!. 엄마 생애에 가장 어려운 이름이다. 그럼 부를 때 [비꼬다](빛곧아)라고 해야 하는 거야?

이름이 예쁘긴 한데 너무 어렵다.”

“맞아요.. 그래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은빛곧에겐 질문을 잘 안하셔요.”

“하하하~~.”

 

새로 태어난 쌍둥이들 제일 좋아하는 큰언니, 조안나

 

 

 

이제는 엄마를 잘 이해해주고, 모든 부분에서 열정적이며 성실하고, 착실하게 큰딸의 역할을 해주는 조안나가 너무 고맙고 대견합니다. 쌍둥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 간 언니부터 찾을 정도로 언니를 너무 좋아합니다. 아 참! 조안나는 2011년 3월에 드디어 제 나이 또래인 6학년에 국어, 수학 진급 시험을 봐서 당당하게 합격했답니다. 이번 주엔 학교 수련회를 떠나는데 장기자랑에 원더걸스 춤을 춘다고 벌써부터 맹연습 중이고요. 춤을 잘 추고, 요가도 잘하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조안나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반에서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집 세 공주님들에겐 별명이 있습니다. 조안나는 머니마니 언덕(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돕는 비젼), 이루안은 사랑룰루 언덕(아름다운 사랑 노래로 많은 사람들 마음에 감동을 줄 비젼), 이지안은 ‘씽씽똑똑’ 언덕(특별한 지혜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비젼) (아이들 이름에 모두 언덕 안(岸)자가 들어가요.^^)

 

 

 

 

 

 

오늘도 우리 부부는 세 언덕이의 별명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매일 행복하고, 감사한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요.

 

 

 

 

 

※ 이글은 법무부가 주최한 ‘2011 재한외국인 생활체험 수기 공모’에서 자원봉사⋅멘토⋅후원자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서울 동작구의 안진서님의 글 ‘머니마니 언덕’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살려두었고, 사소한 오탈자는 수정을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입양을 추진하던 중 임신 20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안진서님의 글을 읽다가 코끝이 찡했습니다. 같은 문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국내입양을 한 가족들도 숱한 갈등에 대해 고백하곤 하는데요,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방글라데시에서 아이를 입양한 안진서님의 가족은 지금의 행복을 일구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가슴으로 낳은 딸 조안나와 천사같은 마음을 지닌 안진서님의 가족들이 정말로 정말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또한 다문화 가족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이 더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