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대한민국 법무부 공식 블로그입니다. 국민께 힘이되는 법무정책과 친근하고 유용한 생활 속 법 상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겠습니다.

법블기 이야기/힘이되는 법

중국 며느리, 한국 시어머니를 말하다

법무부 블로그 2011. 6. 9. 14:00

원제 : 나의 한국 시어머니

 

 

거칠었지만 따뜻했던 시어머니의 첫 손길

 

한국에 와서 처음 시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저는 남편과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 충주에 갔을 때는 저녁 7시쯤이었습니다. 시어머님께서는 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차가 상점 앞에 세워졌을 때 나는 키가 작고 60세쯤 되는 오글쪼글한 얼굴의 할머니가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저의 시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저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시어머니의 손은 매우 거칠었지만 아주 따뜻했습니다. 시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갑자기 포근함이 느껴져 아주 크게 감격했습니다.

 

 

                                           

 

 

그 탓에 서울에서 충주로 오는 차안에서 계속 연습했던 인사말들은 모두 깨끗하게 잊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참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마치 제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처럼 바로 저를 3층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벌써 저를 위해 준비한 푸짐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남편의 통역을 통해 이곳이 저의 한국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집안일에 ‘어머니는 왜 날 괴롭힐까’

 

하지만 저의 첫 감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현실의 삶에서 다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에서 나는 외동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애지중지 키운 나는 밥하고 빨래하는 집안일은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저에겐 한 가족의 생활을 걱정하며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준비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중국에서는 매일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아침밥은 거의 밖에서 사서 집으로 가지고 와 먹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제가 한국으로 시집와서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짓습니다.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께 “밖에서 사다 먹으면 안 될까요?”하고 여쭤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밖에서 산 음식은 비싸고 맛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은 본인의 정성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며느리만 마냥 힘들게 하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어르신이기 때문에 말대꾸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밥을 다 짓고 나서도 시아버지와 남편이 먼저 드신 후에 저와 시어머니가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언어소통이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어머니께 이유를 여쭈어 볼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남편에게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끼를 맡아서 책임졌습니다. 청소하고 바닥 닦고 빨래하고 널고 걷어서 차곡차곡 개고……. 이 모든 것이 싫증이 났습니다. 저는 시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어머니께서 고의적으로 저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숙혜님의 글 '나의 시어머니' 중국어 원문

 

 

출산 후 양육 방식 달라 자주 부딪친 나와 시어머니

 

이후 아들 ‘인엽’이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기는 온 가족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잇따라 걱정도 생겼습니다. 첫 출산이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출산과 양육 방식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차이도 컸습니다. 시어머니는 저에게 모유수유를 권하시며 매일매일 계속 미역국을 먹게 하였습니다. 저는 중국내륙지역에서 자라서 해산물을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미역에서 나는 바다의 냄새를 맡기만 해도 토하려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무슨 말씀을 되풀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 저는 시어머니께서 화를 내시는 줄 알고 더욱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기를 매일매일 목욕시키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아기가 감기 걸린다며 반대했습니다. 저는 종이 기저귀를 사용하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종이기저귀가 환경오염이 된다며 천기저귀를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매일 아침 기저귀를 세탁하고 삶아야 했습니다. 또 시어머니는 아기가 울면 바로 가서 안아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아기의 분유를 타는데 물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는 젖병에 수돗물을 직접 받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수돗물을 바로 받아먹지 않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이런 기본 상식도 모르시길래 정말 무식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후에 알았는데 당시 한국의 수돗물은 음용표준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무식한 거였지요. 저는 어머니가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KBS2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

 

일상생활에서도 시어머니는 저에게 요구하시는 게 많았습니다. ‘화장지를 아껴 써라’, ‘설거지를 할 때 물을 틀어 놓고 씻지 마라’, 특히 ‘남은 밥이랑 반찬은 절대로 버리면 안 된다’……. 중국에서는 그날 먹고 남은 밥이랑 반찬은 다 버립니다. 그렇게 살아온 저에게 시어머니의 말씀은 가르쳐 주시려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일부러 저를 가혹하고 난감하게 만들려고 그러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화장지 없는 것’, ‘세제가 없는 것’ 그리고 ‘조미료가 없는 것’이 왜 모두 저의 책임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내지른 “저는 한국이 싫어요, 중국으로 가고 싶어요!”

 

‘집에 대한 모든 것을 내가 기억해야 돼? 왜 남자들은 집에 돌아와서 집안일을 하면 안 되는 거지?’

 

식사할 때도 남자가 먼저 먹은 후에야 여자들이 먹는 것 등 저는 매우 불만이 컸습니다.

제가 제일 괴로워하는 것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저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제가 스스로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자주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한번은 참을 수 없어 폭발하였습니다. 저는 중국어로 큰 소리로 시어머님께 “왜 저에게 가혹하게 대하세요? 저는 한국이 싫어요. 저는 중국집으로 가고 싶어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시어머님은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셨지만 저의 표정과 태도를 통해 일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중국 다녀오라며 100만원 건네주신 시어머니

 

남편이 귀가한 뒤, 저에 대한 남편의 마음을 알게 된 시어머니는 저를 꾸짖거나 화를 내시기는커녕 오히려 남편한테 중국에 데리고 가서 몇 달 동안 놀다오라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는 당시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사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나더러 빨리 짐을 챙기라고 하셨고 남편에게는 배 승선표(그때 한국은 아직 중국사천과의 직행비행기가 없었습니다)를 사라고 하신 후 저에게 여행비를 제외하고도 한국 돈 100만원(그때의 환율은 1위안이 100원이었음)을 더 주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로부터 그 돈을 받고 눈시울이 촉촉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어깨를 다독이며 “엄마 아빠 보고 싶었지? 중국에 가서 재미있게 놀아라, 그리고 부모님께 안부도 전해 드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갑자기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마치 친부모와 헤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분명히 어머니를 싫어했었는데…….’ 그렇게 어머니를 떠날 때 저의 마음은 정말 아팠습니다.

 

 

 

 

 

15년 세월 지나 지금은 사랑하는 나의 한국 어머니

 

15년의 세월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중국의 부모님들도 잇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어머니의 등에서 자란 우리 아들도 시어머니보다 반쯤이나 더 큽니다. 이제 시어머니는 80세가 넘었습니다. 허리도 굽고 시력도 약해져 물체도 흐릿하게 보입니다. 얼굴의 주름은 훨씬 더 깊어지셨습니다. 행동도 예전처럼 민첩하시지 못합니다. 저는 예전의 철없던 새댁에서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아줌마가 되고서야 시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밥하고 빨래하는 가사 외에 직장생활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머릿속에서 마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저는 시어머니한테 밥하고 빨래하는 것과 아이를 돌보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집안일을 하면서 한국어도 배웠고 한국의 생활습관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항상 저를 공정하게 대하셨습니다. 제가 남편이랑 다투었을 때도 무조건 아들편만 드시는 게 아니라 엄격하게 남편을 훈계하였습니다. 제가 아기를 키우면서 힘들어 하면 저를 도와주셨고 제가 밖에서 괴로움을 당할 때 저를 위로하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심지어 우리집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어머니는 무엇이든 채워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아들과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간섭하시지 않고 오히려 항상 부러운 어조로 “인엽아, 너 정말 좋겠다, 중국어를 할 줄 알아서”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제 중국친구의 아이들 중에는 시어머니의 간섭으로 중국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아이도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시어머니가 더할 나위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가정을 사랑하고, 어떻게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또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과 인생을 즐겁게 긍정적으로 사는 것도 시어머님께 배웠습니다.

 

시어머니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한국의 어머니는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하고 강한 정신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평범한 한국여성이지만, 강하고 굴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일하는 이런 어머니들의 힘이 한국사회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어머니의 늙고 쇠약해진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이 넘칩니다.

 

처음 한국에 올 때 어머니께서 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맞아주신 그 따뜻한 느낌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이글은 법무부가 주최한 ‘2011 재한외국인 생활체험 수기 공모’에서 다문화가족구성원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중국에서 온 왕숙혜(중국, 충북충주시다문화센터)의 글 ‘나의 한국 시어머니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살려두었고, 사소한 오탈자는 수정을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말이 통하는 같은 한국 사람끼리도 결혼을 하고 나면 각 집안의 문화가 달라 ‘고부갈등’을 겪는 일이 수없이 많은데요, 한국어를 거의 할 수 없었던 왕숙혜님과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시어머님 사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 지금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내용을 보니 너무나 흐뭇합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고 있을 이 땅의 많은 다문화가족들이 부디 왕숙혜님의 가족처럼 변치 않는 사랑을 통해 따뜻한 가족을 일구어가길 바랍니다.

 

 

 

                       

 

 

 

 

 

다음 전체에 소개되었습니다. 관심과 사랑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