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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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약사 그녀, 한국남자와 재혼하기까지

법무부 블로그 2011. 6. 30. 14:00

 

원제 : 행복은 늘 우리 곁에 (글쓴이 / 푸레브 엥흐마)

 

안녕하십니까? 몽골에서 온 푸레브 앵흐마입니다. 저는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오빠가 6명, 언니가 1명 있답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태어난 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다니면서 약학공부를 하여, 약사가 되었습니다.

 

 

약사로 살았던 몽골 생활, 이혼으로 좌절

 

 

그 후 국가가 경영하는 약국에서 근무하며 걱정 없이 살았지요. 그러다가 스포츠 선수인 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딸도 하나 얻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혼을 한 뒤에도 전 남편은 술을 마시고 수시로 약국에 찾아왔습니다. 전 남편이 약국에 오면 약국은 시끄러워졌습니다. 오시는 손님들에게 미안하고 창피한 마음에 얼굴을 들기가 힘들었습니다.

 

제가 받는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약국이라고는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몇 개 되지 않는 울란바토르에서 다른 약국으로 옮긴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국을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몽골지도 / google map 캡처

 

 

 

그리고는 케이블 TV리포터, 몽골 캐나다 합작기업의 사무직, 호텔지배인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노력을 해보았지만 약사 월급을 받을 수 없는 저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기만 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사실상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면서 소비에트의 사회제도를 따르던 몽골도 큰 변화와 혼란이 오게 되었지요. 모든 것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기회 많다는 한국 왔건만, 무지개는 없고 가시밭길만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힘들어서 몹시 실망을 하고 있던 차에 제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한국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한국은 몽골보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살기도 훨씬 좋다’고 정말 한국에 가본 사람처럼 신나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의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린 딸을 몽골에 두고 저 혼자 무지갯빛 꿈을 안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와 보니 기대했던 무지개는 찾을 수가 없었고, 많은 어려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고흥의 김공장에서 물인 줄 알고 마셔 취해버린 매실주

 

 

한국에 온 다음날부터 저는 고흥의 어느 김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말을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저는 옆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고 감독하시는 분이 손짓 발짓으로 가르쳐 주면 그렇게 따라했습니다. 거기서 처음 배운 말이 "빨리 빨리"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 빨리"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사장님 가족들이 외출하고 없을 때였는데, 주방에 들어갔다가 작은 열매가 물과 함께 들어있는 큰 유리병이 보았습니다. 신기해서 한번 마셔봤는데 아주 맛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컵 먹고 또 한 컵 먹고 하다 보니, 주방에서 나올 때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 취하고 말았습니다. 마루를 나오다가 넘어졌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사람들이 놀라서 저를 일으켜 세우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대요. 몽골에는 매실이라는 과일이 없어서 저는 그게 매실주인지도 모르고, 그저 맛있는 물인 줄 알고 마신거지요. 그때 만난 사장님과 사모님이 참 좋은 분들이라서 김 만드는 일이 끝난 뒤 서울로 올라가서도 자주 연락을 하고 살았습니다.

 

서울 봉제공장선 재봉틀에 손가락이 들어가기도

 

 

이미지 출처 /Alt image

 

서울에서는 주로 작은 옷 공장에서 보조로 일을 하다가 재봉틀 사용법을 익히고는 그 기술자로 일을 했습니다. 영세한 공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월급을 못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돈은 없고 배는 고프고 값싼 자장면만, 그 자장면만 일 년 가까이 먹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장면은 이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되어버렸답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이나 재단사가 하는 일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점심시간에 혹은 다른 사람들이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재봉틀에 앉아서 열심히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다가 재봉틀에 손가락을 넣어서 손가락이 깊게 패인 적도 있고, 재단 기술을 배운다고 옷감을 자르다가 새끼손가락의 옆 부분을 잘라버린 적도 있습니다.

 

 

잘 살아 보려고 몽골에서 한국으로 왔지만 몇 년이라는 세월만 낭비한 것 같아서 속이 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딸을 위해서도 살아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니가 약사면, 나는 의사다” 코웃음 치던 사장님

 

어떤 공장 사장님이 저를 보고 몽골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어 보기에 약사였다고 했더니 "네가 약사면 나는 의사다"라고 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 사장님은 생각 없이 그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듣는 저는 아주 슬펐습니다.

 

 

 

이미지 출처 /Alt image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불친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한 공장의 사장 어머님은 저를 친딸처럼 예쁘게 보시고는 그 분이 가시는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우리 딸’이라고 자랑을 하시는가 하면, 여러가지로 정말 잘 해주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저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자랐습니다. 딸을 낳은 뒤 그 아이를 바라보며, 저의 아픈 마음을 느끼고 ‘이것이 바로 엄마의 마음이구나’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조국이 아닌 한국에서 그 사장 어머님으로 인해 처음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느껴 느껴보았습니다. 그렇게 한국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제2의 조국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면서 재미있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습니다.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아버려서 다른 공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공장 사장님이 이리 오라고 손짓하시는 것을, 가라고 하는 줄 알고 나가려고 했던 일,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아 너무 미안해서 미안함을 표시하려고 손을 잡으려 했더니 손을 피하면서 이상하게 쳐다보던 일(몽골에서는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거든요) 등을 지금은 웃으면서 기억하게 됩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얄미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착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에 대해서도 남들 보다 잘 알게 되었습니다.

 

외로운 시절, 다시 내려간 고흥에서 만난 그이

 

그렇게 몇 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공장에서 공장으로 일을 하러 다니던 중에 다시 고흥 김 공장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는 고흥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고흥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김 공장에 계시는 분들과 정이 들었는지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김 만드는 일은 겨울에 시작해서 그 다음 해 사월 오월까지 몇 개월이면 끝이 나서 일을 계속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저는 고흥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흥 김 공장에 있는 동안 기계를 고쳐주려고 공장에 들르는 기사분이 한 분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의 남편이 된 그 기사님은 기계를 고치러 공장에 자주 왔고 저와는 이야기도 잘하는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몇 개월 후 김 만드는 일이 끝나서 저는 또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제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습관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마음속으로 ‘나는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외롭거나 슬프거나 나약해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외로움 따위는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갔지만, 많이 외로워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때 고흥에서 기계를 고치던, 제가 잘 아는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어요.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부인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을 같이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도 나처럼 이혼을 했구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깊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인지, 저의 딸과 의논도 해보았지요. 저는 딸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제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지금까지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엄마의 인생도 아름다워야 해요. 딸을 위해서라도."

 

이제 보니까 저는 용감하지도 씩씩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와 손을 잡고 여행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저의 서툰 한국말을 무시하지 않고 열심히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엔지니어로서 아주 성실하고, 한 인간으로서도 착했습니다. 이런 사람과 남은 인생을 같이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결혼을 했습니다.

 

 

재혼 후 딸까지 데려와 2남 1녀의 대가족 꾸려

 

 

몽골을 떠난 지 십여 년, 오빠가 두 분이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의지할 든든한 사람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결혼한 후에 몽골에 가서 아버지와 남아 있는 오빠들도 만나보고, 소원이었던 딸도 데려왔습니다. 지금은 잘 자란 남편의 두 아들과 우리 딸이 함께 생활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제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도와주려고 합니다. 새마을운동 고흥군 지회에서 위탁운영중인 고흥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좋은 교육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을 하고,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에만 신경을 썼는데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 교실을 열어 주셔서 한국어의 문장구조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도 쓸 수 있게 되었지요.

 

남은 꿈은 한국의 약사면허 취득

 

지금은 간호조무사 자격을 받기 위해서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나중엔 몽골의 약사면허 취득 경험을 살려 한국의 약사면허에도 도전할 것입니다. 저와 제 남편의 내일을 위해서 건강이 지켜주는 한 끝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항상 생각합니다. 내일도 오늘만큼만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한국에 계시는 많은 결혼 이주여성 여러분!

우리 파이팅 합시다.

여러분 가정의 발전과 남편의 나라인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이 있도록 건강하고 예쁜 생활을 만들어갑시다.

행복은 늘 우리 곁에 함께 할 것입니다.

 

 

 

 

※ 이글은 법무부가 주최한 ‘2011 재한외국인 생활체험 수기 공모’에서 다문화가족 구성원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몽골에서 온 푸레브 엥흐마님의 글 ‘행복은 늘 우리 곁에’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살려두었고, 사소한 오탈자는 수정을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나라보다 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 가운데는 그 나라에서 엘리트로 성장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말도 잘 모르는 이국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생활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지요. 푸레브 엥흐마님 역시 몽골에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약국의 약사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뜻하지 않은 이혼으로 한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때 약사였던 그녀가 한국에선 힘든 육체노동을 마다않고 극복해왔던 눈물겨운 과정을 읽다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늦게라도, 한국인 남편과 재혼을 하고, 몽골에 있는 딸도 데려와 새로운 가족을 꾸리게 되어 행복하다니 정말 흐뭇합니다. 부디 푸레브 엥흐마님이 소망하는 한국약사 면허 취득도 현실이 되어 그녀와 그녀 가족, 그리고 많은 다문화가족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