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대한민국 법무부 공식 블로그입니다. 국민께 힘이되는 법무정책과 친근하고 유용한 생활 속 법 상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겠습니다.

법블기 이야기/힘이되는 법

세기의 재판, 정말 이런 일이 있었어?!

법무부 블로그 2013. 12. 9. 15:02

세기의 재판

 

설민이는 법정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검사의 모습에 완전히 반해 버렸습니다.

풍부한 근거와 날카로운 논리, 그리고 정확한 증거로 범죄자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모습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설민이는 검사야 말로 법의 수호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누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판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흥미로운 재판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모르지?”

 

 

 

최근 법정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사법부와 재판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들이 참 많으실 것 같아요.

그런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판들보다 더 흥미진진한 재판들이

이미 수세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세기의 재판에 대해 알아볼까요?

 

Ⅰ. 드레퓌스 재판

 

1894년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한 청소부가 종이쪽지를 발견합니다.

그 쪽지에는 독일군에게 보내지는 군사기밀로 당시 가장 중요한 전쟁기술인 포병부대의 계획이 적혀 있었는데요,

유태인에 대해 적대심이 심했던 시절, 특히 프랑스가 독일에 빼앗긴 영토인 알자스 지역 출신인

‘유대인 드레퓌스’는 유력한 간첩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됩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고 석 달도 되기 전에 군법회의가 비공개로 열렸고,

7명의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리고 국가반역죄로 종신 유배형과 계급 박탈을 선고받고, 드레퓌스는 악마의 섬으로 유배됩니다.

 

1년이 지난 후에 정보부의 새 국장으로 임명된 피카르 소령에게 예사롭지 않은 문서 하나가 배달되었는데요,

그 문서에는 에스테라주와 독일 대사관 사이에 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적혀있었습니다.

피카르 소령은 이 사실을 재조사하였고, 그 결과 에스테라주가 진범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는데요,

 

이 사실을 바로 참모본부에 보고하지만

고위 장교들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피카르 소령의 끈질긴 에스테라주의 체포 요구로 진범재판이 열렸지만

법무관들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고 합니다. 무죄 선고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에밀졸라

 

이후부터 이 사건에 대한 한 작가의 위대한 고발이 시작되었는데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에밀졸라 작가’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공개편지입니다.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나는 맹세코 주장합니다. 나의 생애와 명예를 걸고 확언합니다. 이 엄숙한 순간, 이 법정 앞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당신들과 배심원 여러분 앞에서, 프랑스 앞에서, 드레퓌스의 결백을 나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최고재판소가 명한 재심에서 드레퓌스가 한 말>

나는 다만 조국과 군을 향해 죄가 없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이어갈 나의 이름에 명예를 되찾아 주기 위해 5년 동안 몸서리쳐지는 고통을 참아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정직성과 정의감에 비추어 나의 그러한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합니다.

 

 

 

 

 

 

Ⅱ. 외설 서적 재판

 

 

1928년 여름,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출판사에서 어렵게 한 권의 책이 출판됩니다.

이 책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외설 출판물이냐, 아니냐?’의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킨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은 나오자마자 영국과 미국의 세관 당국에 의해 몰수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사망한 후에도 30년 동안 계속해서 판매 금지를 당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 채털리 부인의 사랑 책표지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전쟁에서 성불구가 되어 돌아온 남편과 살고 있는

채털리 부인이 정원사와 만나 진정한 사랑의 각성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스토리는 사실 진부할 수도 있고, 작가도 건강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결혼 제도의 옹호자였는데,

왜 판매 금지를 당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책 속에 있습니다.

욕설인 ‘f**k’. 's**t'가 너무 자주 나온다는 것이 당시 지배층에게 문제였던 것이지요.

1959년에 미국에서는 이 책의 합법적인 출판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의 열띤 공방에도 불구하고, 책의 배포 금지 결정은 최종적으로 해제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결국 사건은 외설 서적 재판을 위해 연방 법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외설 서적의 기준은

‘현대 사회에서 평균사람에게 정욕을 일으키게 하는 경향성 있는 책과 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기준에 의해 많은 책이 출판 금지 되었는데요,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판결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전의 막연한 기준에서 탈피하여 ‘성에 관한 부끄럽고 병적인 관심’이라는 제한적인 해석을

도입하게 된 것이지요.

 

그는 ‘침수이론’을 새롭게 제시하면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외설적이지 않다고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0년에 영국에서도 재판을 통해 출판 금지가 해제되었다고 하네요.

 

 

<침수이론>

판사 브라운이 ‘채털리 부인의 사랑’ 사건의 판결에 적용한 논리로,

성적 표현이 그 책의 나머지 부분을 침수시킬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으면 외설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Ⅲ. 수잔 앤소니 재판

 

1872년 11월 1일 아침, 뉴욕 주 로체스터 선거 사무실에 세 명의 여자들이 밧줄로 몸을 묶고 나타나는데요,

그녀들 중 한 명의 이름은 ‘수잔 브라우넬 앤소니’. 그녀는 미국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한 여인이었습니다.

 

 

 

▲수잔 앤소니의 초상

 

수잔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시민이 된 모든 사람은 미합중국의 시민이고,

이들의 시민권과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수정 헌법 14조를 인용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끝내 수잔은 투표를 하는데 성공합니다.

 

“여자가 투표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으며 모든 신문이 이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했고,

한 격분한 남자시민이 불법선거라는 이유로 그녀를 고발하여, 곧 수잔 앤소니에 대한 재판이 진행됩니다.

 

1873년 6월 수잔의 변호사 헨리 셀던은 “그녀는 법을 어기지 않았다”며,

미국 수정 헌법 제 14조와 15조에 따라 성별의 차이 때문에 투표를 못 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합니다.

 

셀던의 변호는 약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의 발언이 끝나자 헌트 판사는 미리 준비해 둔 연설문을 주머니에서 꺼내는데요,

 

그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합니다.

 

“수정 헌법 제 14조는 여성의 선거권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14조는 생명, 자유, 재산, 공평한 재판의 권리,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배심원이 유죄 평결을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것으로 그렇게 하기를 명령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판사의 독단에 배심원들이 항의하자,

 

헌트판사는 보란 듯이 배심원들을 해산하고 직접 수잔 앤소니에게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그 누구도 벌금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싸웠다고 하네요.

 

<수잔 앤소니가 재판 직전에 한 말>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평화롭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미합중국의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정을 받는 최후의 승리를 얻어 낼 때까지 계속하게 될 것이다.”

 

 

 

 

 

Ⅳ. 아미스타드 재판

 

1839년 6월, 스페인 깃발을 단 ‘아미스타드호’는 쿠바의 해안 도시로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 배에는 4만 달러 상당의 금과 상품, 2만 5천 달러 가치가 있는 53명의 흑인 노예가 타고 있었는데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 '아미스타드'

 

그러나 7월 2일 밤, 아미스타드호의 노예들은 선상반란을 일으켜

백인 2명을 제외한 선장과 요리사 등 나머지 선원들을 죽이고 배를 장악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고향인 아프리카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죠,

그들은 살려둔 백인들에게 아프리카로 항해하기를 요구했지만

백인들은 배가 남아메리카 해안에 닿기를 희망하며 몰래 배를 서쪽으로 몰았습니다.

 

그리하여 뉴욕의 롱 아일랜드에 당도한 아미스타드호는 미 해군 함정 워싱턴호에 견인되어 뉴런던에 인양됩니다.

이 때 미국에서는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당시 미국의 북부지역은 남부와 달리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엄청난 정치적 압력을 받게 됩니다.

스페인과의 국제적인 분쟁과 미국의 노예 제도에 관한 논쟁 때문이었는데요,

스페인 특사들은 노예에게 시민권을 인정한 것이라며 강하게 항의합니다.

 

그러나 첫 재판은 흑인들의 우세였습니다.

“폭동은 바다 한가운데서 스페인 선장에게 행해졌고, 미국 법원은 이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리고 이 흑인들을 노예로서 재산 문제로 취급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라는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아미스타드호의 흑인들은 불법 납치된 자유인으로 백인에 대한 저항과 살인도 정당방위’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아미스타드호의 흑인들은 석방되었던 것입니다.

재판 후에 흑인들은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배를 탔습니다.

행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노예 매매 금지를 법적으로 관철시킨 것이지요.

이 재판은 노예 해방 운동에 큰 활력을 가져다 주었다는데 있어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정리해 본 세기의 재판!! 어떠셨나요?

억울하기도, 답답하기도 한 과거의 재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의 재판들이 미래엔 어떻게 평가될지도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