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대한민국 법무부 공식 블로그입니다. 국민께 힘이되는 법무정책과 친근하고 유용한 생활 속 법 상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겠습니다.

법블기 이야기/힘이되는 법

“팔 병신, 팔 병신” 놀림 받던 우리 어머니

법무부 블로그 2010. 10. 8. 09:00

늘 가슴 속에 그리움으로 자리 잡은 어머니

 

김00 | 광주교도소 출소자

 

  

 

  

 

 

건물 뒤뜰에서 여치와 귀뚜라미들이 우는 걸로 보니 이제 완연한 가을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기일도 곧 다가오네요. 저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 마다 속이 아려옵니다. 계실 때 잘해드리라는 어른들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돌아가신 뒤에 이렇게 후회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어머니와 어린 시절의 제가 살았던 곳은 해발 300m가 넘는 섬진강 상류지역의 산중마을이었습니다. 제가 열한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홀로 저를 키우셨습니다. 어머니가 장애인이라는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에 알게 됐습니다. 동네 아이들 중 한 명이 “네 엄마는 팔 병신, 팔 병신.”하고 놀렸는데 다른 아이들도 마치 합창하듯 “팔 병신, 팔 병신”하고 놀렸습니다. 전 울면서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어머니의 팔을 자세히 봤더니 왼쪽 팔이 구부러져 가슴에 오그라져 붙어 있더군요. 저는 그때부터 어머니를 창피하게 생각했고, 친구들도 멀리했습니다. 온 몸에 힘을 주며 걸어도 술 취한 사람처럼 흔들거리는 어머니의 걸음이 싫었고, 같이 버스라도 탈 일이 생기면 멀찌감치 떨어져 혹시나 어머니가 부르실까봐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저의 행동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저를 위해 아랫목을 따뜻하게 해주셨고, 따뜻한 도시락을 싸주셨습니다. 또 땔나무와 산나물을 장에 내다 팔아서 제 학비를 차곡차곡 보태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다 발을 헛디뎌 구르고 마셨습니다. 그 바람에 어머니의 소중한 앞니가 모두 빠지고 말았지요. 사실 어머니의 앞니는 어머니의 왼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땔나무를 묶을 때, 빨래를 널을 때 어머니의 앞니는 어머니 왼손 노릇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앞니가 빠진 것도 불효한 자식인 저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걸 알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않고 빠진 이로 몇날며칠을 지내오신 어머니가 답답하고 괜히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 덧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한 직장에 오래있지 못 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해 다녔습니다. 어쩌다 시골집에 가도, 늘어지게 잠만 자다 아무 소리 없이 떠나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꿈도 희망도 없이 삼류 인생을 살았고, 술과 담배에 찌든 생활을 했습니다. 카드빚을 내어 경륜장과 경마장을 찾았고, 빚은 점점 늘기만 했습니다. 결국 저는 스스로 빚을 다 갚지 못해, 비겁함을 무기 삼아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제가 교도소에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불편한 손으로 저를 안아주시며 말없이 우시기만 했습니다. 교도소에 있을 때도 어머니는 꾸준히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저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를 하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어머니 속마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나 소원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 장가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좋은 색시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착하게 살거라”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열심히 살아서 돈 많이 벌면, 나중에 나 앞니나 좀 해줘라.” 저는 그 날 어머니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행복하게 해드리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요.

 

 

 

 

그렇게 제 생각이 바뀌자 제 인생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경마장 도박도 끊고, 카드빚도 한 푼씩 갚아갔습니다. 건설업(철근)에서 일을 했는데 제법 돈도 많이 만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께 치아도 해드리고, 예쁜 옷도 사 드리고, 좋은 음식도 사드릴 수 있을 만큼 됐을 때 저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건 옆집 할머니셨습니다. “얘, 안 그래도 너랑 연락이 안 돼서 발을 동동 굴렀다. 너희 어머니가 쓰러지셨어. 얼른 병원으로 와” 전화를 끊고 저는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누워계셨는데, 다행히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첫 마디가 “우...리...애...기 왔네!” 였습니다. 서른이 넘은 저를 보고 ‘우리 애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몇 개월 동안 어머니 옆에 바짝 붙어 재활훈련도 시켜드리고 식사도 챙겨드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몸은 삭정이처럼 점점 말라가기만 했고 결국 영면하고 마셨습니다.

 

 

뒤늦게 저는 어여쁜 아내도 만나고 저를 쏘옥 빼 닳은 아이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께는 그 어떤 것도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가끔 TV드라마를 보다가 “엄마” 하는 소리에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 만큼 어머니는 제 마음에 큰 부분으로 차지해있습니다. 어머니께 행복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 하고 죄를 지었던 지난 날을 저는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교도소 같은 데는 가지 않고 정말 열심히 살았을 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제 마음은 아리기만 합니다.

 

 

이 글은 교정본부에서 재소자들의 글을 모아 만든 책

‘새길(통권 407호)’에 실린 글입니다.

죄목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재소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죄목을 밝히지 않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잠깐!

교도소에서 복역한 사람들 중에 약 1/4은 3년 내에 또 다시 범죄를 저질러 재복역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우리나라의 경우 연평균 수용자 수가 4만 8천여명에 달합니다. 이 중 1만 500여명(22.7%)이 3년 내에 재복역하는 인원입니다. 이 수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은 수치지만, 그래도 아직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무부는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 ‘재범방지 사업’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범죄예방 사업’보다 더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수형자들의 건강한 사회복귀를 위해 취업 알선·기술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수형자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블로그코리아에 블UP하기